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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그래픽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생각이 바뀌는 것들이 있다.

처음 그래픽을 배울 때는 아무래도 디테일에 눈이 간다.

갑옷에 장식을 하나 더 붙이고, 옷에 주름을 더 만들고, 텍스처에 흠집을 넣고, 노멀맵을 강하게 넣으면 뭔가 더 고급스러운 그래픽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런 디테일도 중요하다.

그런데 게임 그래픽을 오래 만들다 보니 결국 그보다 먼저 봐야 하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루엣이다.


https://jensenzhou.artstation.com/projects/8lrG06


검은색으로 칠해도 알아볼 수 있는가

캐릭터를 완전히 검은색으로 칠해놓고 봤다고 생각해보자.

얼굴도 안 보인다.

텍스처도 안 보인다.

옷의 무늬도 없다.

색깔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캐릭터인지 알아볼 수 있다면 그 캐릭터는 형태 자체에 상당히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마리오의 모자와 코,

소닉의 가시처럼 뻗은 머리,

피카츄의 긴 귀와 꼬리.

우리가 이 캐릭터들을 알아보는 데 고해상도 텍스처는 필요하지 않다.

커다란 형태 몇 개만으로도 이미 캐릭터가 성립한다.

이게 실루엣의 힘이다.


https://www.artstation.com/artwork/yJw2q3


콘셉트 아티스트들이 처음부터 얼굴을 그리지 않는 이유

캐릭터 디자인 과정을 보면 재미있는 게 있다.

잘하는 콘셉트 아티스트들은 처음부터 눈, 코, 입을 열심히 그리지 않는다.

검은 덩어리 몇 개를 수십 개씩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머리가 큰 캐릭터.

어깨가 넓은 캐릭터.

다리가 짧은 캐릭터.

상체가 삼각형인 캐릭터.

무기를 엄청 크게 든 캐릭터.

이 단계에서는 얼굴도 없고 옷의 세부 디자인도 없다.

먼저 보는 건 하나다.

형태가 재미있는가.

멀리서 봐도 다른 캐릭터와 구분되는가.

게임 화면에서는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게임은 캐릭터를 확대해서 감상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3D 캐릭터를 작업할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다.

Blender나 Maya에서 캐릭터 얼굴을 화면 가득 확대해놓고 작업한다.

주름 하나를 만들고,

버클 하나를 만들고,

옷의 재봉선도 넣는다.

확대해서 보면 멋있다.

그런데 게임 안에 넣는다.

캐릭터가 화면에서 300픽셀 정도가 된다.

조금 멀어지면 150픽셀.

전투가 시작되면 캐릭터는 계속 움직인다.

그 순간 우리가 몇 시간을 들여 만든 작은 버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머리가 큰지 작은지는 보인다.

어깨가 넓은지는 보인다.

무기가 큰지는 보인다.

팔과 다리의 비율은 보인다.

결국 실제 플레이 화면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정보는 대부분 큰 형태다.


https://pojgaerlan.artstation.com/projects/D5BZKO


그래서 과장이 필요하다

게임 캐릭터 디자인이 현실 사람과 조금 다른 것도 같은 이유다.

현실적인 사람의 비율을 그대로 만들면 의외로 게임에서는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캐릭터 디자인에서는 일부러 과장한다.

큰 손.

큰 발.

넓은 어깨.

작은 허리.

커다란 무기.

엄청 긴 코트.

머리보다 훨씬 큰 모자.

이런 것들이다.

현실에서는 이상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오히려 읽기 쉽다.

특히 여러 캐릭터가 동시에 등장하는 게임에서는 더욱 그렇다.

멀리서 봤을 때

“저건 탱커.”

“저건 마법사.”

“저건 빠른 캐릭터.”

라는 것이 한눈에 보여야 한다.

좋은 디자인은 설명서를 읽기 전에 형태가 먼저 이야기한다.


디테일이 많다고 좋은 디자인은 아니다

요즘 AI 이미지나 AI 3D 모델을 보면 가끔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처음 보면 굉장히 화려하다.

옷에는 장식이 엄청나게 많고,

갑옷에는 문양이 가득하고,

벨트와 버클과 주머니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얼굴에도 디테일이 많다.

그래서 첫인상은 굉장히 좋다.

그런데 캐릭터를 작게 축소해보면 갑자기 평범해지는 경우가 있다.

큰 형태에서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AI는 작은 디테일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이미 상당히 뛰어나다.

그런데

어떤 형태를 크게 만들고 어떤 형태를 버릴 것인가

라는 문제는 조금 다른 영역이다.

디자인의 영역이다.

3D 모델링에서도 똑같다

이건 콘셉트 디자인에서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3D 모델링에서도 똑같다.

나는 캐릭터를 만들 때 가능하면 모델을 멀리서도 본다.

확대해서 보면 자연스러운데 멀리서 보면 이상한 경우가 정말 많다.

머리가 조금 작다든지,

팔이 조금 짧다든지,

어깨가 좁다든지,

배가 충분히 나오지 않았다든지.

수치로 보면 큰 차이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 실루엣에서는 굉장히 큰 차이가 난다.

그래서 세부 모델링에 들어가기 전에 큰 덩어리를 계속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가끔은 아예 모델을 검은색으로 놓고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텍스처와 재질이 사라지면 형태의 문제점이 훨씬 잘 보인다.


예전 저해상도 게임에서는 더 중요했다

사실 이 원칙은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옛날 게임에서 훨씬 중요했다.

화면 해상도가 낮고,

사용할 수 있는 색이 적고,

캐릭터 스프라이트가 몇십 픽셀에 불과했던 시대에는 디테일로 캐릭터를 설명할 수 없었다.

몇 개의 픽셀로

머리,

몸,

무기,

자세를 표현해야 했다.

그래서 좋은 옛날 게임 캐릭터를 보면 작은 화면에서도 형태가 굉장히 명확하다.

픽셀 하나하나는 단순한데 전체 모양은 강하다.

제약이 오히려 디자인의 본질을 더 중요하게 만든 셈이다.

30년을 해도 결국 다시 기본으로 돌아온다

게임 그래픽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새로운 기술을 정말 많이 접한다.

폴리곤 수는 계속 늘어났고,

텍스처 해상도도 높아졌고,

노멀맵이 등장했고,

PBR이 등장했고,

실시간 레이트레이싱까지 왔다.

이제 AI가 모델과 텍스처까지 만들어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기본적인 것의 중요성을 다시 느끼게 된다.

형태.

비율.

색.

명암.

실루엣.

결국 이런 것들이다.

아무리 4K 텍스처를 사용해도 형태가 재미없으면 재미없는 캐릭터다.

반대로 텍스처가 단순해도 실루엣이 좋으면 캐릭터가 산다.

그래서 요즘은 캐릭터를 볼 때 이런 질문부터 해보게 된다.

“이 캐릭터를 새까맣게 칠해도 재미있어 보이는가?”

그 질문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다음에 디테일을 넣어도 늦지 않다.

어쩌면 게임 그래픽에서 가장 비싼 디테일은 수백만 개의 폴리곤이 아니라,

처음에 제대로 잡아놓은 하나의 좋은 형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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