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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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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게임 그래픽 일을 하다 보면 AI 이야기를 피할 수가 없다.

컨셉 이미지를 만들어주고, 그림을 수정하고, 텍스처를 만들고, 3D 모델까지 생성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AI가 그림을 그린다"는 이야기가 신기한 뉴스거리였다면 이제는 현업에서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다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 없어지는 것 아니야?"

나 역시 게임 그래픽 일을 오래 해왔기 때문에 이 문제를 남의 이야기처럼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요즘 AI를 직접 써보면서 느끼는 것은 조금 복잡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업 자체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 중 상당수는 분명히 없어지거나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게임 그래픽은 원래부터 계속 자동화되어 왔다

생각해 보면 게임 그래픽 제작은 항상 이런 식으로 변해왔다.

예전에는 도트를 하나씩 찍었다.

텍스처도 직접 그리고, 그림자도 텍스처에 그려 넣고, 캐릭터 애니메이션도 모든 동작을 사람이 직접 만들었다.

그러다 3D가 등장했고 포토샵이 보편화됐고 노멀맵 베이킹이 등장했다.

Substance Painter 같은 툴이 등장하면서 예전에는 사람이 하나하나 그리던 재질 표현도 상당 부분 자동화됐다.

SpeedTree가 나왔고, 모션 캡처가 보편화됐고, 포토그래메트리와 스캔 데이터도 게임 제작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제 이 직종 없어지는 것 아니냐."

하지만 없어졌다기보다는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작업의 범위가 계속 바뀌었다.

AI도 결국 그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번 변화는 이전보다 훨씬 빠르다.

그게 조금 무섭다.


AI가 가장 먼저 가져갈 것은 '반복 작업'일 것이다

게임 그래픽 작업에는 생각보다 단순 반복 작업이 많다.

비슷한 이미지 수십 장을 만들거나, 기존 리소스의 변형을 만들거나, 텍스처의 작은 부분을 수정하거나, 여러 가지 디자인 시안을 빠르게 뽑아보는 작업들이다.

이런 작업들은 AI가 굉장히 잘한다.

특히 사람이 30분, 한 시간 걸려 만들던 것을 몇 분 만에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매력적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AI가 아티스트를 대체한다"

라기보다는

"아티스트가 하던 작업 중 AI가 더 싸고 빠르게 할 수 있는 작업부터 가져간다"

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영역은 앞으로 계속 넓어질 것이다.


특히 신입에게는 꽤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오히려 걱정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게임 그래픽 업계의 초급 업무 상당수는 원래 신입들이 담당했다.

간단한 리소스를 만들고, 기존 리소스를 수정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하면서 조금씩 경험을 쌓았다.

그 과정에서 선배가 만든 데이터를 뜯어보고 실패도 하면서 실력이 늘었다.

그런데 AI가 그런 일을 대신하기 시작하면 회사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작업 때문에 굳이 한 명을 더 뽑아야 하나?"

경력자는 AI를 이용해서 예전보다 훨씬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회사가 5명을 뽑던 일을 3명으로 해결하려고 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나는 AI 시대에 가장 먼저 어려움을 겪을 사람들이 의외로 숙련된 아티스트가 아니라 이제 업계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꽤 걱정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경력자는 안전할까?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경력이 오래됐으니까 괜찮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위험하다.

AI가 발전하면 단순 제작 능력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예전에는 그림 하나를 잘 그리는 것 자체가 상당한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이미지를 AI가 몇 초 만에 수십 장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좋은 결과물인지 판단할 수 있는가.

쪽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AI가 아직 못하는 중요한 일이 있다

AI에게 이미지를 만들어달라고 해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처음 결과는 굉장히 그럴듯하다.

그런데 게임에 실제로 넣으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캐릭터 디자인의 앞뒤가 맞지 않거나, 다른 캐릭터와 스타일이 맞지 않거나, 게임 플레이에서 중요한 부분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컨셉 아트 한 장으로 보면 멋진데 실제 게임 화면에서는 쓸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게임 그래픽은 단순히 예쁜 그림을 만드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실루엣이 플레이 중에 잘 보여야 하고 배경과 캐릭터가 구분돼야 하며 UI가 올라갈 공간도 고려해야 한다.

카메라 거리도 생각해야 하고 애니메이션도 고려해야 하고 성능도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 게임 전체가 하나의 비주얼 방향을 유지해야 한다.

이건 한 장의 그림을 잘 만드는 문제와는 조금 다르다.


결국 '만드는 사람'에서 '판단하는 사람'으로

나는 앞으로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의 역할이 조금씩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내 손으로 얼마나 잘 만들 수 있는가"

가 중요했다면 앞으로는

"수많은 결과물 중 무엇이 우리 게임에 맞는지 판단하고 그것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가"

가 훨씬 중요해질 것이다.

아트 디렉션의 중요성이 오히려 커질 수도 있다.

AI가 이미지 100장을 만들어줘도 어떤 것이 좋은지 판단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반대로 기본적인 조형, 색, 구도, 라이팅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은 AI를 이용해서 자신의 생산력을 몇 배로 늘릴 수도 있다.

결국 AI가 실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실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바꾸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나는 "AI는 그냥 도구일 뿐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낙관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AI 때문에 실제로 사라지는 업무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필요한 인원도 줄어들 수 있다.

한 사람이 AI를 이용해서 과거 두세 사람이 하던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회사가 굳이 예전과 같은 인원을 유지할 이유는 없다.

이건 현실적인 문제다.

특히 게임 업계처럼 제작비와 인건비에 민감한 산업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AI를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반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둘 다 위험하다고 본다.


그래도 나는 AI를 배우는 쪽을 선택할 것 같다

게임 그래픽 일을 하면서 툴은 정말 많이 바뀌었다.

도트 그래픽에서 3D로 넘어왔고, 직접 텍스처를 그리던 시대에서 PBR 기반 제작으로 넘어왔다.

사용하는 엔진도 바뀌었고 제작 방식도 계속 변했다.

그때마다 새로운 것을 다시 배워야 했다.

AI도 결국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싫든 좋든 앞으로 게임 제작에서 AI가 빠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별로 없다.

AI와 경쟁하기보다는 AI를 내 작업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

그리고 AI가 결과물을 아무리 빨리 만들어내더라도 그 결과가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계속 유지하는 것.

어쩌면 앞으로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손이 빠른 것도, 특정 프로그램을 잘 다루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과,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능력.

AI 시대가 될수록 오히려 이런 오래된 기본기가 더 중요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내 생각은 이렇다.

AI가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AI를 잘 사용하는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가, AI를 사용하지 않는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의 자리를 가져가는 일은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아마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그쪽일 것이다.

 

------------------------생각나는게 있어 더 추가해본다 ------------------------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AI가 도구일 때'의 이야기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니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사실 하나의 전제를 깔고 있다.

AI는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라는 전제다.

사람이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고, AI에게 명령하고, 나온 결과물을 사람이 판단하고 수정한다.

현재의 생성형 AI는 대체로 이 구조 안에 있다.

그래서 "AI를 잘 사용하는 디자이너가 AI를 사용하지 않는 디자이너를 대체할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성립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과연 AI는 앞으로도 계속 도구로만 남아 있을까?


만약 AI가 '만드는 것'뿐 아니라 '판단하는 것'까지 한다면?

현재 우리가 AI보다 인간에게 우위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영역들이 있다.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능력.

게임 전체의 비주얼 방향을 유지하는 능력.

플레이 상황에 맞춰 가독성을 조절하고, 캐릭터와 배경의 관계를 설계하고, 결과물을 평가하고 다시 수정하는 능력.

현재로서는 이런 부분에 사람의 판단이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AI의 발전이 여기에서 멈춘다는 보장은 없다.

예를 들어 미래의 AI가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면서 캐릭터의 가독성을 분석한다고 생각해보자.

플레이어가 적을 얼마나 빨리 인식하는지 측정하고, 배경과 캐릭터의 명도와 색상 차이를 분석하고, 수천 번의 가상 플레이 테스트를 돌린 뒤 캐릭터 디자인을 스스로 수정한다.

아트 스타일이 일관되지 않으면 스스로 찾아내고, 특정 지역의 프레임이 떨어지면 리소스를 최적화하고, 유저 테스트 결과가 좋지 않으면 UI나 이펙트까지 수정한다.

그리고 다시 게임을 플레이한다.

결과를 확인하고 또 수정한다.

이 과정이 가능해진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때의 AI는 더 이상 포토샵이나 블렌더 같은 의미의 '도구'가 아니다.

하나의 작업자에 가까워진다.


"좋은 것을 보는 눈은 인간에게 남는다"는 말도 영원할지는 모른다

나 역시 지금은 아티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가 좋은 것을 판단하는 눈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것조차 AI가 침범하지 못할 영역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AI가 수많은 게임과 영화, 미술 작품, 디자인 데이터를 학습하고 실제 사용자 반응까지 분석할 수 있다면 인간이 말하는 '좋은 느낌'의 일정 부분을 통계적으로 찾아낼 가능성도 있다.

더 나아가 하나의 게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분석하고

"이 게임은 어떤 분위기를 가져야 하는가?"

"어떤 캐릭터가 이 세계관에 어울리는가?"

"어떤 색과 조명이 플레이 경험에 적합한가?"

같은 문제까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그때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AI에게 명령을 잘하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라는 말조차 낡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조차 필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 하나를 AI가 통째로 만드는 시대

조금 더 먼 미래를 상상해보자.

사람이 AI에게 이렇게 말한다.

"198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액션 RPG를 만들어줘. 플레이타임은 15시간 정도이고, 세가 새턴 시절 게임의 느낌이 조금 났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AI가 게임을 기획한다.

캐릭터를 디자인한다.

3D 모델을 만들고 리깅과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배경을 제작한다.

프로그램을 작성한다.

사운드와 음악을 만든다.

밸런스를 조정한다.

수천, 수만 번 게임을 스스로 플레이하면서 버그를 찾고 난이도를 조절한다.

완성된 게임을 다시 평가하고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고친다.

지금 당장은 과장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문장 몇 줄로 고품질 이미지를 만들고, 영상을 생성하고, 프로그램 코드를 작성하는 현재의 AI 역시 많은 사람에게는 상당히 먼 미래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그런 시대는 절대로 오지 않는다."

라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된다면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는 정말 사라질까?

여기까지 가면 솔직히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AI가 단순 제작뿐 아니라 기획, 판단, 수정, 검증까지 자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만의 문제가 아니다.

프로그래머도 마찬가지이고 기획자도 마찬가지다.

게임 개발이라는 직업 구조 자체가 크게 변할 수 있다.

지금은 한 게임을 만들기 위해 수십 명, 수백 명이 필요하다.

미래에는 그것이 몇 명이 될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는 한 명일 수도 있고, 인간 제작자가 거의 필요하지 않은 형태가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단계에서는

"AI를 배우면 살아남는다."

라는 조언도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AI가 사람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시대와 AI가 사람의 역할 자체를 수행하는 시대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게임을 만들지 않게 될까?

나는 이것 역시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진기가 등장했다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았다.

신디사이저와 컴퓨터 음악이 등장했다고 직접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산업적인 필요가 줄어드는 것과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가 사라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AI가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훌륭하게 게임을 만드는 시대가 오더라도 사람은 계속 게임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것이 지금처럼 '직업'으로서 존재할 것인가는 다른 이야기다.

오히려 미래에는

"이 게임은 AI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이 직접 만들었습니다."

라는 것이 하나의 가치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수공예품이나 아날로그 음반에서 특별한 가치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AI를 단순한 새로운 툴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포토샵도 도구였다.

3D 프로그램도 도구였다.

게임 엔진도 도구였다.

이 도구들은 아무리 발전해도 기본적으로 사람이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AI는 조금 다를 가능성이 있다.

AI가 발전하는 방향 중 하나는 사람이 더 편하게 사용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지만, 또 다른 방향은 사람이 하던 판단과 실행의 일부를 스스로 수행하는 시스템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 능력이 계속 발전한다면 언젠가는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획자,

프로그래머,

그래픽 디자이너,

아트 디렉터

같은 직업의 경계 자체가 의미 없어질 수도 있다.

그 시대가 언제 올지는 나도 모른다.

정말 그런 수준까지 갈 수 있을지도 아직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가능성 자체를 무시하면서

"AI는 결국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다."

라고 결론 내리는 것도 나는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현재만 본다면 AI는 분명 강력한 도구다.

가까운 미래에는 AI를 잘 사용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유리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더 먼 미래까지 바라본다면 질문은 달라진다.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AI에게 인간이 반드시 필요한가?'

나는 오히려 이 질문이 앞으로 훨씬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게임 그래픽 일을 오래 해온 사람으로서 그 미래가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꽤 두렵다.

내가 평생 해온 일이 더 강력한 도구를 만나는 것인지,

아니면 언젠가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새로운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인지.

지금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이번 변화는 우리가 지금까지 겪었던 단순한 '새로운 툴의 등장'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And

1994년 말 세가 새턴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 게임기의 미래가 그렇게 험난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지금 새턴을 다시 떠올려보면 참 묘한 감정이 든다.

플레이스테이션이 결국 시장을 장악했고, 3D 게임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새턴은 흔히 "3D에 약했던 게임기"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래픽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새턴 게임들을 다시 보면 조금 다른 모습이 보인다.

이 기계, 2D 화면 하나만큼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다.

그렇다면 정말 세가 새턴은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2D 최강의 게임기'였을까?


새턴의 독특한 구조, VDP1과 VDP2

새턴 그래픽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VDP1과 VDP2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VDP1은 캐릭터나 폴리곤 같은 오브젝트를 그리는 역할을 맡았고, VDP2는 배경 화면을 담당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VDP2였다.

VDP2는 여러 개의 배경 레이어를 겹쳐 표시할 수 있었고 스크롤, 확대·축소, 라인 스크롤, 회전 같은 효과를 하드웨어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새턴 게임을 보면 화면 뒤쪽에서 뭔가가 계속 움직인다.

구름이 흘러가고, 바닥이 움직이고, 먼 배경과 가까운 배경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지금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것들이 화면을 굉장히 풍부하게 만들어줬다.

개인적으로 2D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스프라이트의 해상도나 색상 수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화면 전체가 얼마나 살아 움직이는가.

새턴은 이 부분에서 굉장히 재미있는 기계였다.


플레이스테이션과는 애초에 철학부터 달랐다

새턴과 플레이스테이션을 비교하면 두 기계가 상당히 다른 방향을 보고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플레이스테이션은 처음부터 3D 폴리곤 게임에 상당히 공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새턴은 전통적인 2D 게임 제작 방식과 새로운 3D 표현이 한 기계 안에 묘하게 섞여 있었다.

새턴의 VDP1은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일반적인 삼각형 기반 GPU와도 조금 달랐다. 사각형 기반의 왜곡 스프라이트를 이용해 폴리곤을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그래서 3D에서는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지만 반대로 2D 게임을 만들 때는 상당히 강력한 무기가 됐다.

거기에 VDP2가 배경을 담당한다.

결국 새턴은

앞에서는 VDP1이 캐릭터를 그리고, 뒤에서는 VDP2가 여러 겹의 배경을 움직이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2D 게임을 만들기에는 상당히 호화로운 구성이다.


《가디언 히어로즈》를 보면 새턴다운 화면이 보인다

새턴의 2D 능력을 이야기하면서 트레저의 《가디언 히어로즈》를 빼놓기는 어렵다.

화면에는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고 거대한 스프라이트와 각종 이펙트가 난무한다.

무엇보다 화면이 굉장히 부산스럽다.

좋은 의미로 말이다.

캐릭터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배경과 효과가 함께 움직이면서 화면 전체에 에너지가 느껴진다.

요즘 게임 그래픽은 PBR이나 라이팅, 포스트 프로세싱으로 화면의 밀도를 만든다면 당시 2D 게임들은 레이어와 스프라이트의 움직임으로 화면의 밀도를 만들었다.

이 차이를 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프린세스 크라운》은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줬다

아틀라스의 《프린세스 크라운》도 개인적으로 새턴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게임이다.

화려한 특수효과보다는 아름답게 그려진 캐릭터와 배경,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눈에 들어오는 게임이다.

훗날 《오딘 스피어》나 《드래곤즈 크라운》으로 이어지는 조지 카미타니 특유의 비주얼 스타일을 이미 여기에서 볼 수 있었다.

특히 캐릭터가 단순한 게임용 스프라이트라기보다 움직이는 일러스트레이션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새턴의 2D 능력이 단순히 "스프라이트를 많이 표시한다"는 숫자 경쟁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가지고 아티스트가 어떤 화면을 만들었느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턴을 괴물로 만들어버린 4MB RAM 카트리지

새턴 후기 2D 게임을 이야기한다면 이것도 빼놓을 수 없다.

4MB RAM 확장 카트리지.

특히 캡콤의 CPS-2 계열 아케이드 게임 이식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X-MEN vs. STREET FIGHTER》 같은 게임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상당했다.

당시 아케이드와 가정용 게임기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걸 집에서 이렇게까지 돌린다고?"라는 느낌이었다.

캐릭터 애니메이션 프레임을 크게 희생하지 않고 아케이드판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플레이스테이션판 대전격투 게임에서 메모리 부족 때문에 애니메이션 패턴이 줄거나 캐릭터 교대 시스템 자체가 변경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상당히 컸다.

그래서 일본에서 새턴이 유독 대전격투 게임 팬들에게 사랑받았던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2D 최강'이라는 말에는 약간의 함정도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새턴이 무조건 압도적인 2D 머신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조금 조심해야 한다.

새턴은 구조가 상당히 복잡한 기계였다.

SH-2 CPU 두 개에 여러 보조 프로세서, VDP1, VDP2까지 존재했다.

문제는 하드웨어가 많다고 해서 개발자가 자동으로 그 성능을 전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여러 프로세서를 효율적으로 나눠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그래서 새턴은 흔히 말하는 '이론적으로는 강력하지만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운 하드웨어'의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이 부분은 훗날 세가의 드림캐스트와 비교하면 더욱 재미있다.

드림캐스트는 상대적으로 개발하기 편한 방향으로 설계됐고, 결과적으로 짧은 생애에도 상당히 좋은 결과물들이 빠르게 등장했다.

세가도 새턴에서 많은 것을 배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대는 2D를 떠나고 있었다

새턴에게 가장 안타까운 부분도 바로 이것이다.

새턴은 정말 훌륭한 2D 게임기였다.

그런데 새턴이 등장했던 1994~1995년은 사람들이 더 이상 2D 게임기의 성능을 궁금해하지 않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버추어 파이터》, 《철권》, 《릿지 레이서》 같은 게임들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완전히 3D로 이동하고 있었다.

게임 잡지에서도

"스프라이트가 몇 개 나오는가?"

보다는

"폴리곤을 몇 개 그릴 수 있는가?"

가 중요한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새턴의 비극은 성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 다시 보면 정말 매력적인 기계다

나는 지금도 새턴의 2D 게임 화면을 좋아한다.

요즘 게임처럼 깨끗하지도 않고 고해상도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면에서 힘이 느껴진다.

큼지막한 스프라이트가 움직이고 그 뒤로 여러 장의 배경이 서로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반투명이나 왜곡 같은 효과가 섞이면서 화면 전체가 움직인다.

그래픽 디자이너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지금보다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화면을 풍성하게 보이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개발자들의 고민이 더 잘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새턴을 단순히 실패한 게임기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3D 게임기의 시대에 태어났지만 내부에는 2D 게임 제작 기술의 정점에 가까운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던 이상한 게임기.

그게 세가 새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새턴 게임을 돌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새턴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2D 괴물이 아니었을까.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