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말 세가 새턴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 게임기의 미래가 그렇게 험난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지금 새턴을 다시 떠올려보면 참 묘한 감정이 든다.
플레이스테이션이 결국 시장을 장악했고, 3D 게임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새턴은 흔히 "3D에 약했던 게임기"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래픽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새턴 게임들을 다시 보면 조금 다른 모습이 보인다.
이 기계, 2D 화면 하나만큼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다.
그렇다면 정말 세가 새턴은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2D 최강의 게임기'였을까?
새턴의 독특한 구조, VDP1과 VDP2
새턴 그래픽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VDP1과 VDP2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VDP1은 캐릭터나 폴리곤 같은 오브젝트를 그리는 역할을 맡았고, VDP2는 배경 화면을 담당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VDP2였다.
VDP2는 여러 개의 배경 레이어를 겹쳐 표시할 수 있었고 스크롤, 확대·축소, 라인 스크롤, 회전 같은 효과를 하드웨어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새턴 게임을 보면 화면 뒤쪽에서 뭔가가 계속 움직인다.
구름이 흘러가고, 바닥이 움직이고, 먼 배경과 가까운 배경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지금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것들이 화면을 굉장히 풍부하게 만들어줬다.
개인적으로 2D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스프라이트의 해상도나 색상 수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화면 전체가 얼마나 살아 움직이는가.
새턴은 이 부분에서 굉장히 재미있는 기계였다.
플레이스테이션과는 애초에 철학부터 달랐다
새턴과 플레이스테이션을 비교하면 두 기계가 상당히 다른 방향을 보고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플레이스테이션은 처음부터 3D 폴리곤 게임에 상당히 공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새턴은 전통적인 2D 게임 제작 방식과 새로운 3D 표현이 한 기계 안에 묘하게 섞여 있었다.
새턴의 VDP1은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일반적인 삼각형 기반 GPU와도 조금 달랐다. 사각형 기반의 왜곡 스프라이트를 이용해 폴리곤을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그래서 3D에서는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지만 반대로 2D 게임을 만들 때는 상당히 강력한 무기가 됐다.
거기에 VDP2가 배경을 담당한다.
결국 새턴은
앞에서는 VDP1이 캐릭터를 그리고, 뒤에서는 VDP2가 여러 겹의 배경을 움직이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2D 게임을 만들기에는 상당히 호화로운 구성이다.
《가디언 히어로즈》를 보면 새턴다운 화면이 보인다
새턴의 2D 능력을 이야기하면서 트레저의 《가디언 히어로즈》를 빼놓기는 어렵다.
화면에는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고 거대한 스프라이트와 각종 이펙트가 난무한다.
무엇보다 화면이 굉장히 부산스럽다.
좋은 의미로 말이다.
캐릭터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배경과 효과가 함께 움직이면서 화면 전체에 에너지가 느껴진다.
요즘 게임 그래픽은 PBR이나 라이팅, 포스트 프로세싱으로 화면의 밀도를 만든다면 당시 2D 게임들은 레이어와 스프라이트의 움직임으로 화면의 밀도를 만들었다.
이 차이를 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프린세스 크라운》은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줬다
아틀라스의 《프린세스 크라운》도 개인적으로 새턴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게임이다.
화려한 특수효과보다는 아름답게 그려진 캐릭터와 배경,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눈에 들어오는 게임이다.
훗날 《오딘 스피어》나 《드래곤즈 크라운》으로 이어지는 조지 카미타니 특유의 비주얼 스타일을 이미 여기에서 볼 수 있었다.
특히 캐릭터가 단순한 게임용 스프라이트라기보다 움직이는 일러스트레이션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새턴의 2D 능력이 단순히 "스프라이트를 많이 표시한다"는 숫자 경쟁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가지고 아티스트가 어떤 화면을 만들었느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턴을 괴물로 만들어버린 4MB RAM 카트리지
새턴 후기 2D 게임을 이야기한다면 이것도 빼놓을 수 없다.
4MB RAM 확장 카트리지.
특히 캡콤의 CPS-2 계열 아케이드 게임 이식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X-MEN vs. STREET FIGHTER》 같은 게임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상당했다.
당시 아케이드와 가정용 게임기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걸 집에서 이렇게까지 돌린다고?"라는 느낌이었다.
캐릭터 애니메이션 프레임을 크게 희생하지 않고 아케이드판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플레이스테이션판 대전격투 게임에서 메모리 부족 때문에 애니메이션 패턴이 줄거나 캐릭터 교대 시스템 자체가 변경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상당히 컸다.
그래서 일본에서 새턴이 유독 대전격투 게임 팬들에게 사랑받았던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2D 최강'이라는 말에는 약간의 함정도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새턴이 무조건 압도적인 2D 머신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조금 조심해야 한다.
새턴은 구조가 상당히 복잡한 기계였다.
SH-2 CPU 두 개에 여러 보조 프로세서, VDP1, VDP2까지 존재했다.
문제는 하드웨어가 많다고 해서 개발자가 자동으로 그 성능을 전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여러 프로세서를 효율적으로 나눠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그래서 새턴은 흔히 말하는 '이론적으로는 강력하지만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운 하드웨어'의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이 부분은 훗날 세가의 드림캐스트와 비교하면 더욱 재미있다.
드림캐스트는 상대적으로 개발하기 편한 방향으로 설계됐고, 결과적으로 짧은 생애에도 상당히 좋은 결과물들이 빠르게 등장했다.
세가도 새턴에서 많은 것을 배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대는 2D를 떠나고 있었다
새턴에게 가장 안타까운 부분도 바로 이것이다.
새턴은 정말 훌륭한 2D 게임기였다.
그런데 새턴이 등장했던 1994~1995년은 사람들이 더 이상 2D 게임기의 성능을 궁금해하지 않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버추어 파이터》, 《철권》, 《릿지 레이서》 같은 게임들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완전히 3D로 이동하고 있었다.
게임 잡지에서도
"스프라이트가 몇 개 나오는가?"
보다는
"폴리곤을 몇 개 그릴 수 있는가?"
가 중요한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새턴의 비극은 성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 다시 보면 정말 매력적인 기계다
나는 지금도 새턴의 2D 게임 화면을 좋아한다.
요즘 게임처럼 깨끗하지도 않고 고해상도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면에서 힘이 느껴진다.
큼지막한 스프라이트가 움직이고 그 뒤로 여러 장의 배경이 서로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반투명이나 왜곡 같은 효과가 섞이면서 화면 전체가 움직인다.
그래픽 디자이너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지금보다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화면을 풍성하게 보이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개발자들의 고민이 더 잘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새턴을 단순히 실패한 게임기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3D 게임기의 시대에 태어났지만 내부에는 2D 게임 제작 기술의 정점에 가까운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던 이상한 게임기.
그게 세가 새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새턴 게임을 돌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새턴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2D 괴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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